Home » 진시황의 종법제도가 불러온 패러다임의 전환

진시황의 종법제도가 불러온 패러다임의 전환

  • by

앞서 다른 장에서도 나온 적이 있지만 임금을 죽였을 때 시해라고 한
다. 춘추필법에는 올바른 임금을 죽였을 때 시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임
금을 죽였을 때는 살이라고 기록했다. 맹자의 의견을 수용한다면 탕이다. 무왕은 신하로서 임금인 결과 주를 살해한 것이지 시해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물음이 하나 생긴다. 김재규의 궁정동 저격은 시해일까? 살해일까?
시황의 만리장성은 중국의 관광 수입원 정도지만, 그가 만든 나라 진진, BC 201~BC 206에서 중국의 영어명 China가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하되 하나의 대륙으로서의 중국을 만든 장본인이다. 중국이 유럽처럼 다
가 사회로 발전하지 않고 하나의 국가로 이어진 계기는, 너무나 일찍 진시
합이 중국을 거대 제국으로 통일을 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폐를 통일하고 도로를 정비한 정도의 유형의 업적은 중국 문명의 패려다.
이을 부족이나 민족, 국가가 아니라 제국의 틀 안에서 시작하게 한 시황제의 무형의 업적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다….
아무튼,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그의 성은 영이고 이름은 정이다. 볼모로 간 제후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큰 장사치
엮던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으리만큼 출생이 모호했다. 출생이 모
호화니 유년이 행복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영정은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마침내 진나라의 패권을 잡고 천하를 통일하는 대망을 이룬다. 당시 중국인
은 중국과 중국의 주변부가 지구의 전부라고 여기고 이를 천하라 불렀다. 하
늘 아래 전부라는 뜻이다.
공자의 이상이었던 주나라의 지배구조가 무너지자 천하는 혼란에 빠졌다. 종법 제도 宗法 制度라는 독특한 정치구조로 중국 전역을 다스렸던 주나라 정권 잃자 군웅들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워낙 크므로 중앙 정부가 모든 지역을 다스릴 수 없었다. 주나라는 지역마다 중앙정부에 귀
되는 또 다른 정부를 세워, 이들이 지방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를 종법 제도라 한다.
대는 문자 그대로 전쟁의 시대였다. 철기가 보급되면서 전쟁의 양상
이 격렬해졌다. 늘 그렇듯, 신무기는 대량살상을 불러온다. 농민이 전쟁에 그가 복무하느라 한 해 농사늘 못 짓는 문제가 아니라, 나갔다 하면 전사
를 하는 바람에 영영 농사르 1
나라에 영영 농사를 못 짓는 일이 되풀이되자, 민심은 전쟁 종식
을 갈망했다. 패러다임의 전환기가 온 것이다.
이 무렵 진시황이 등장했고, 그는 중국을 통일했다. 세계사에서 진시황의
중국은 정치, 사회, 경제 등 온갖 국가 제도를 갖춘 인큐베이터였다. 그러나 그는 법을 앞세워 잔혹의 통치를 떨친 인물로 더 유명하다.
어쨌거나 진시황의 거대 폭력의 그늘에서 수많은 비극이 양산됐다. 진시
황을 비판하는 모든 세력은 죽음을 맞이했다. 당연히 저항이 생겨났다. 저
항을 폭력으로 제압하려고 하면 또 다른 비극이 탄생한다는 것을 진시황
은 몸으로 증거를 남겼다. 진시황의 폭압을 끝내려는 계획이 연나라에서
조용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강국 진나라와 이웃한 연나라는 일찍부터 진나라의 침탈로 국토를 유린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태자 단이 볼모로 진나라에 잡혀가게 된다. 인질
C 결이 예정보다 길어지자 단은 고국으로 돌려보내 달라 간청하지만, 진
시왕은 그때마다 거절한다. 까마귀 머리가 하얘지면 보내주겠다는 따위의
말도 안 되는 능청만 떨었다. 참다못한 단은 몰래 진나라를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와 진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인질 생활로 진나라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진이 연을 침략하리라 생각하고, 선수를 치려 한 것이다.
실패와 재기에 대하여
절치부심 切齒腐心 이를 갈고 마음을 썩인다.
다시 연나라의 진시황 암살 계획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연히 저잣거리를 지
나가던 전광은 형가의 노래를 듣고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와 친
분을 쌓게 된다. 태자 단의 명을 받자 전광은 곧 형가를 떠올렸다. 궁에서 나
온 건강은 형가를 찾아가 전후 사정을 말하고 칼을 물고 자결해버린다. 전
광은 태자 단에 비밀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했고, 또 형가에게 목숨을 걸고 일을 해달라고 한 이상, 암살 계획의 비밀을 지키면서 형가에게 그 일의
상을 뼛속 깊이 심어주려면 자신도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누
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영가는 전광의 최후를 태자 단에 알리고 왕궁에 머물며 계책을 세운다. 그
그나 진나라 법에 진시황을 알현하려면 반드시 전공 戰功이 있어야 했다. 때신 진나라 장군 번호기가 진나라에 죄를 짓고 연나라에 망명하러 와 있었다.
사하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부사 이야기를 가공해 너
운 것으로 보았다.
츠비 다일,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자객을 위해 태자 단, 조정의 신하고
전리가 강가에 섰다. 성공해
가에 섰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다시 이 강을 건널 수는 없다. 고점
리는 지음의 친구를 위해 악기 초의
의 친구를 위해 악기 축을 켰다. 그 곡조는 너무 슬퍼 듣는 사
– 너희 몫이 저절로 흘렀다. 형가는 친구의 곡조에 맞춰 노래로 화답한다.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風蕭蕭易水寒
떠나는 사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네. 壯士一去不復還
진에 도착한 형가와 진무량은 뇌물을 써 시황제를 함양군에서 알현하게 된
다. 평소 진무량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인을 할 정도로 담력이 섰다고
하는데 천하의 황제 앞에 서자 두려웠는지 벌벌 떨고 말았다. 배석한 신하
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당황한 형가가 재빠르게 시황제에게 고한다. “진무량은 촌놈이라 황제를 처음 알현하니 몹시 두려운가 봅니다.” 그러자 시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그건 되었고, 진무량이 가져온 연나라 동항의 지도가 보고 싶구나, 지도나 어서 갖고 오너라.”
이에 형가가 작은 상자를 들고 황제에게 다가간다.
사를 열자 작은 비수가 나온다. 형가는 왼손으로 황제의 소매를 잡고 황제가 상자를 열자 작은 비수가 오른손으로 비수를 들어 일격을 날린다. 그러나 칼은 빗나가고 황제의 죽에는 놀라 급히 도망가면서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매만 잘리고 만다. 그러나 장검이라 칼이 칼집에서 잘 빠져나오지 않았다. 시황제는 급
다 아나 기둥 사이에 숨었다. 신하들은 속수무책 束手無策이었다. 진나라 법
에 따르면 황제의 집무실 안에서는 누구도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경호원도 뜰에서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집무실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상황이 다급해도 아무도 나설 수가 없었다. 현가가 도망가는 황제를 뒤쫓으며 필살기를 날리려는 순간, 어의 하무카가
애탕을 던져 형가를 쓰러뜨린다. 이때 군신들이 소리를 지른다.
“폐하, 칼을 등에 짊어지십시오.” |
칼이 길어 잘 빠지지 않으니 등에 지고 칼을 뽑으라는 말이었다. 황제는 등
에서 칼을 뽑아 쓰러진 형가의 왼쪽 허벅지를 찔렀다. 형가는 아픔을 참은
모 황제를 향해 칼을 던졌으나 청동 기둥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나 뒹굴고 말았다. 형가는 죽어가면서 진무량을 욕했다. “일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네가 살려고 겁을 냈기 때문이다.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떨지 않았다면 약속을 지켜 태자의 은혜에 보답했을 것이다. 천하의 평화를 갈구했던 자객은 이렇게 의연히 죽어갔다. 이후 시황제가 자신의 암살을 계획한 연나라를 무참히 짓밟은 것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같은 거기에서 끝났지만, 지금까지도 중국은 형가를 기억한다. 의리와 명분을 위해서 큰길을 떠났던 사내를 높이 사는 것이다. 훗날 중국 사람들은 형가의 의리를 떠올리며 그가 건넜던 역수가 있는지 성에 그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은 지금도 있다.
구태와 어리석음
각주구검 刻舟求劍 배에 표시를 새기고 칼을 찾는다.
기원전 223년, 진시황은 명장 완전과 몽압에 초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초나라 학연은 사력을 다했지만 결국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로써 훗날 학연의 손자 항우가 조부의 뜻을 이어 군사를 일으키기까지 중
국은 진시황 영정 歸正이 통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