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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유식사상이 오른 경지가 의미하는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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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변화한 분이 만약 유유히 창공으로 사라졌다면 『장자』는 우화로 끝나고 사람들은 더 읽지 않았을 것이다. 슈퍼맨이 지구를 몇 바퀴 돌면서 지구를 구했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했다. 그런 이야기라면 구태여 힘들 게 장자』를 읽지 않고 누워서 텔레비전만 봐도 충분하다.
엔 유식사상唯識思想에서 말하는 전식득지轉說得智, 즉 인식을 바꿔 지
그러한 경지가 담겨 이다. 앨리슨의 표현을 빌리면 영혼의 변화
『장자』엔 유식사상唯識思想。 혜를 얻는 그러한 경지가 담겨 있
다. 바로 이러한 점이 『장자를 고전 중의 고전으로 부를
Spiritual transformation 다. 바로는 이유이다.
장자, 행복의 조건
포정해우丁解牛 표정이 소를 뜨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배부른 돼지와 걺
주린 소크라테스 중에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행복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살고 싶어 한다. 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안온한 삶을 바란다. 본능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본능만으로 행복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그래서 인간사는 더욱 복잡하다. 따라서 우리에겐 바른길[道]이 필요하다. 장자는 이를 양생’이라고 했다. 양생은 ‘生’을 ‘養’하는 것으로, 나쁜 건강 生을 보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에게 애초 참되게 주어진 ‘生’을 잘 기르고 보존한다는 뜻이다. 『장자』는 많은 부분이 우화 fable로 이뤄진 책이다. 우화는 이해가 쉽고 기억 이 오래가는 장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해라
거인 명령엔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이래오라 마음에 남는다. 강가에 등장하는 아래의 두 이야기도 그렇다. 나 해 게 왕을 숙이라고 하고 북해 제왕을 홀 初라 하며, 중앙의 제왕을
도라 한다. 숙고 홀은 자주 혼동의 집에 놀러 갔는데, 혼돈의 대접은 매우 융숭했다. 숙고 홀은 어떻게 하면 혼돈의 은혜를 갚을까 상의했다. 가라는 누구나 일곱 구멍이 있어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후손 만 이것이 없다. 우리가 그를 위해 구멍을 뚫어주자. 그래서 날마다 구멍 하나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강자』의 많은 이야기가 그렇지만, 모호하고 한 번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위 이야기도 그렇다. 읽는 이마다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어쩌면 장가는 삶의 유한함과 앎의 무한함 사이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를 이야
기하고 가 한 것일지도 모른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갈음하려는 태
도, 이런 태도는 아 깁고 잘못된 신념을 낳은 법이다. 내가 아는 것이 다 아 는 것이라고 각각 하는 순간, 우리는 서슴없이 타인을 보이지 않게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역사에서 우리는 이러한 실상을 수없이 봐왔다. 또 다른 이야기 한 편을 보가,
이 문제 왕을 위해 소를 갚았다. 손이 닿고, 어깨로 기대고, 발로 밟고 무릎을 굽히면 소의 뼈와 살이 갈라지면서 서걱서걱, 싹둑싹둑 소리가 나는데 모두 음악 같았다. 마치 탕왕 때 음악인 살림이나 요임금 때 음악인
경수 그럼 아름다웠다.
문예 군이 이 광경을 보고 감탄했다.
표정은 칼을 내려놓고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보다 경지가 높은 것입니다. 신이 것을 소를 잡을 때는 눈에 소만 보였습니다. 3년쯤 되자 소의 모습은 보이지 안
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맺으니 정신이 운행하기 시작합니다. 하늘의 이치대로 살과 뼈 사이의 틈을 따라 칼질을 하고 소 몸이 생긴 대로 따라갑니다. 제 기술로도 지금껏
살과 뼈를 한 번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뼈와 뼈 사이가 넓다면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솜씨 좋다고 하는 백정도 1년에 한 번은 칼을 바꾸는데 살을 베기 때문인
내다. 보통 백정은 매달 칼을 바꿉니다. 뼈를 자르니 그렇습니다. 반면에 저
는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떴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
다.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으로
틈새에 넣으니, 넉넉하여 칼날이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러니 19년이 지 나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시퍼렇습니다. 하지만, 힘줄과 뼈가 엉긴 곳은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심조심
정신을 모으게 됩니다. 시선을 고정하고 칼질은 천천히 하며 섬세하게 손
잘합니다. 뼈에서 살이 툭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서 주변을 살펴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문혜군은 감동에 젖었다. “훌륭하도다! 나는 표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깨우쳤도다.” 여기서 표정이 소를 뜬다는 뜻을 가진 고사상의 포정해우丁解牛가 나왔다.
그러나 그 안엔 더 길
표정이 소를 뜰 때는 하는 이
법칙이나 원리로 만들어갔다.
그 뜰 때는 하늘의 이치, 즉 천 리에 따른다고 했다. 세상이 어떤
의리로 만들어갔다면 그것이 바로 천 리다. 하늘의 음성이다. 세
사이 그 아래에 있기에 소의 몸 안에도 하늘의 이치가 존재한다. 그 이키 너희 기왓장에도 똥오줌에도 있다. 표정은 그 이치대로 찾아갈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하늘의 이치를 알 수 있는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다음의 장면
을 보자.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만
지지도 말라 너희어서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
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
누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임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기라 여가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아담은 하나님의 뜻으로 창조되었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했다. 이것이
깨서 말하는 원지다. 즉 인간은 천 리와 합치하는 부분과 그렇지 안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리다.
그 동시에 갖고 태어난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바른길(道 이 필요한
은 부분을 동시에 갖고 태어난다
1. 다시 한번 포경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 소를 잡을 때는 눈에 소만 보였습니다. 3년쯤 되자 소의 모습은
“신이 처음 소를 잡을 때는
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뼈 사이의 틈을 따라 칼질을 하고 소 몸이 생긴 대로 따라갑니다.
기서 말하는 감각은 관 官이라 하고 정신은 신 神이라 한다. 서양철학의 요
어로는 육체와 정신이다. 장자의 육체, 즉 관은 세계를 바르게 인식할 수 이
너희 모이다. 만약 이 몸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예를 들어 눈이 사물을 제대로
보고 귀가 사물을 제대로 듣는다면 그것도 신 神이 될 수 있다.
태초에 이브가 뱀의 유혹을 물리쳤다면 다음 사태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
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이것이 한편으로 인간
을 더욱 온전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린다.
자유의지가 바른 길 道를 선택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
다. 표정은 이를 깨달았다. 그렇기에 19년 동안 한 번도 칼을 갈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혼돈의 일곱 개 구멍 이야기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영미 학자들은 『장자』의 혼돈을 카오스 chaos로 번역하곤 한다. 그러나 그 말
뜻대로 창조 이전의 무질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창조 직후의 모
습기를 뜻한다. 그러니까 혼돈은 곧 자연의 질서이자, 천 리인 셈이다. 이브를
유혹하는 뱀처럼 숙고 홀은 혼돈을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