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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을 확보하는 지식의 중립성을 바라보자

그에 빠지는 것과 젖는 것을 생각해보자. 논리적으로는 빠진 이후에라야
젖는다. 그러나 빠지는 순간이 바로 젖는 순간이다. 이런 과정에서 경무가 논리적으로 선행할 뿐이고 결과적으로 보면 격물과 평천하는 간격이 없이 모든 인격체의 전면적 깨달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주자 이후 드러나지 않은 이치가 한 가지도 없고, 밝혀지지 아니한 극이 한 구절도 없다. 그런데 윤휴는 감히 자기 견해를 내세우며 제하고 심은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대는 성혼 선생의 외손이면서도 도리어 윤휴 편을 들어 주자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의 졸개가 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위의 이야기에서 주자 이후 드러나지 않은 이치가 한 가지도 없다고 말한
송시열의 자신감은 경직된 교조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송시열이 당쟁의
주체였던 노론의 영수로 꼽히는 이유를 잘 알 만한 일화다. | 아무튼, 다시 저희로 돌아가, 팔조 목을 살펴보면 물결이 후지지’ 然而后知
이 A 이후 B’라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지식을 확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마음의 도덕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이룩한다는 논리 구조인 셈이다.
사신을 다스리고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이룩 하니
노 보면 무엇을 이룬 연후에 무엇을 한다는 구조이다. 그래서 우
내용으로 보면 무엇을 이룬
가 놈이 정치하려 한다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이다.
은이 제가도 모사 높이 정치하려 한다는 말을 사
物과 평천하 天下의 거리가 순차적인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다
그러나 격물 格物과 평천하 平天下
· 형식과 달리 격물과 평천하는 등가이며 동시 적이다. 세상의 이치
행동을 삿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인간의 행동이 삿되지 않지 않다.
하다. 조직원끼리 불신한다면 와해는,
] 불신한다면 와해는 시간문제다.
경제력도 군사력도 백성이 이
인과 국가의 근본으로 사이
여도 백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공자께서 이 믿음을 개
L이 그 본으로 삼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적 장치라고 여러 차
예 말씀하셨다.
공자 말씀을 더 새겨보자.
리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됨을 알 길이 없다. 큰 수레에 소와 연결할
– 그가 없고 작은 수레에 말의 멍에를 걸 데가 없으면 어떻게 수레를 끌
고갈 수 있겠느냐?”
공자에게 믿음은 인간관계의 기축이자 인간의 진정한 가능성의 길이며 또
다른 사럼과 관계를 묶어주는 중요한 고리이다. 믿음은 말과 행동의 일치다.
인간이라는 의미가 사람 사이라는 뜻인데, 이는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사
람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묶어
주는 것은 신뢰다. 말을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공자께서 모든 약속을 무조건 지키라고 말씀하지는 않았다. 공자
는 인간 사회에서 절대나 완전 같은 추상적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상황에 맞게 처신하지
만, 사적 이기심을 극복하고 인간의 보편적 도덕성에 기초해 처리하라고 해
그대 이행해야 하느냐, 아니면 때에 따라 수정해도 좋을 것인가
다. 약속을 절대 이행해야 하느냐, 이
고대 중국에서 늘 논쟁이 되어 왔다. 우선 『장자』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라 숙제는 고 중국의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 수양산에서 리
“백이와 숙제는 고 중국의
| 매장해주는 자도 없었다. 포 초는 세상을 비난하다가 이고
섰고 그 유해를 매장해주는 자도
채 죽었다. 신도 적은 임금에게 충고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돌나물을 껴안은 채 죽었다.
숨을 잃은 부정적인 사례로
라가 목숨을 도리어 위태로세
브성적인 사례로 삼는다. 강가의 의도는 인식 명부와 기도는 자사
는 것이다. 절개, 충성 고 인간 본성을 거스르기에
‘어 위태롭게 하므로 버려야 하며 강연의 도를 따르다
서 약속은 인간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거는 기름이
의 약속은 솜털처럼 가벼워진다.
근기에 명을 개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던 사람끼리
『전국책』에 소개된 소진은 진 나가
개 된 소진은 진나라에 대항해 “국 연합을 성사시킨 연 가스
노 오명 한 인물이다. 어떤 사람이 소진에게 신용이 없다고 모함하기 소기
자기에게 미생과 같은 신뢰가 없다고 하면서 왜 그런 기를 항복하다.
가.
기에 종삼의 효가 있었다면 부모 곁을 떠나지 못했고, 백이와 거 같은 결
개가 있었다면 두 임금을 섬기지 못했을 것이며, 미생처럼 약속을 지켰다
한쪽을 위해 일해야 했기에 연회 같은 계책을 성사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고 항변한다. 소진은 미생의 고사를 믿음과 신뢰의 대명사로 해석했다.
장자가 이데올로기를 포함해 헛된 명분에 집착하는 표본으로 미성의 그가
늘 인용했다면, 소진은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절대 신뢰의 표상으로 미성을 예로 들었다. 두 사람 입장은 다르지만, 백성을 위한다는 근본 취지는 같다. 장자는 인간 이 본성의 도를 따름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소진은 강대국 진
국의 안전을 꾀하고 백성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길 바
에 맞서 약소국의 안전을 꾀하고
다면, 세종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주장하는 사람의 온 위
갔다. 그렇다면, 세종시를 이
일이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주장인지 그것을
지를 살피면 될 일이다. 누구를 1
면 진실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들은 백성을 위해 미생을 끌어
다시 살피면 진실이 드러난 것 들였을까?
부모 뜻의 잘 받드는지
지 養志, 곧 부모의 뜻을 반
1작 받드는 것이 효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했는데, 증자는 이 양
야기는 『맹자』에 나온다.
그의 뜻을 받드는 것을 잘하여 효자로 이름을 남겼다. 증자의 이
증자는 아버지 증서의
조선을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다. 상을 물릴 때
증자는 항상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님, 남은 음식을 이웃에게 나눠줄까요?
이에 아버지가 “남은 것이 있느냐?” 물으면 증자는 반드시 있습니다.”라
고 대답했다.
셋이 죽고 증자의 아들 증원이 증자를 봉양할 때도 술과 고기를 반드시 올
폈다. 그러나 증원은 “나눠주실 곳이 있습니까?”하고 묻지 않았다.
증자가 “남은 것이 있느냐?” 물으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그것을 안 꼈다가 다시 상에 올리려 했다.
증원의 효는 부모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몸만 살피고 봉양한
것이다. 증자 같으면 양지라고 할 만하다. 부모님을 섬기는 일은 증자처럼 만 하면 좋다. 증자는 아버지의 뜻을 살폈지만, 증원은 아버지의 뜻을 살피지 않고 음식 봉양에만 급급했다. 여기서 증원이 효자가 아니라고 읽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