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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결말은 무엇인가

이 말은 서양 철학자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나오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준칙인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
제와 자주 비교된다. 쉽게 보편적 법칙 Universal law에 맞게 살아라, 정도로 이
해하면 무난하다. 칸트의 ‘의지’와 공자의 ‘마음’은 같은 의미로 쌍을 이룬
다. 칸트의 보편적 입법 원리와 공자의 구 또한 맥락이 같다.
칸트가 설정한 정언명령 定言 命令은 곧 공자가 말하는 자연의 이치이다.
정언명령이나 천명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의무이다. 그렇지만,
이 경기는 시간 안에서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거룩한(聖] 영역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
문이다.
이 점에서 칸트와 공자가 지향하는 철학의 궁극적 목표가 갈린다. 마음을 닦아 깨달음을 성취한 공자에 비해, 인간의 유한성을 인식한 칸트는 의지
만으로는 끝내 보편적 법칙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이고 하늘의 소리이다. 이 세계가 어떤 보편의 법칙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법칙이 바로 천명이다. 생멸하는 모든 존재는 이 법칙 아래 구현되는데 인간은 그 법칙 속에 존재하지만, 가끔 그것과 어긋난다. 이 어긋남은 고유하면서 개별적이고 주관적이다. 세계와 인간의 결절은 어디서 오는지 늘 논쟁의 대상이다. 아무튼, 이러한 어긋남과 결절을 욕망이라고 부른다. 이 욕망은 사람마다 달라서 우리는 서로 충돌한다. 단순화해보면 욕망에는 두 가지 동력이 있다. 하나는 세계의 질서에서 일탈하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보편적 질서와 합일하려는 것이다. 불혹이란 일탈의 마음을 극복하고 주관을 확립함을 뜻한다. 지천명은 이 주관의 근거인 세계의 구성원리(天命)를 인식하고 존재의 당위와 가능성을 탐색함을 뜻한다. 주관과 객관의 합일, 물아일체 物我一體의 경지를 공자는 나이 쉰 뒤에 도달한 것이다.
물아일체의 경지를 경험하면 우리는 귀를 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말
을 들으려면 사사로운 욕심이 없어야 한다. 그 사람의 처지에서 마음을 헤
아리려면 주관을 버려야 한다. 욕심은 감각을 가둔다. 닫히면 아무것도 등
시 못한다. 타인의 말은 욕심을 버려야 비로소 들린다. 달관의 경지다. 달
관은 세상 이치늘 제대로 깨닫고 외부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초탈한 경지
를 일컫는데, 자연스레 귀가 순해진다. 그래서 예순을 이순 耳順이라 한다.
날 알아주었으면 하는 허영심을 잠재우고 그저 내가 남을 모를까
사람이 날 알아주었으면 하는 허영
염려하는 단계에 이른다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리라. 이립에는 이
이리에는 이런 공자의 의
지가 숨어 있다.
끈질긴 노력 끝에 얻은 자신감이야말로 역경을 헤쳐나가는 의
4 거의 헤쳐나가는 원천이다. 공자
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여러 나라를 떠돌다 목숨이 의태군
그 떠돌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까
지 이른다. 그러나 그는 이런 믿음과 자신이 있었기에 한 번도 흔들리지 아
고 그의 길을 걷는다. 여기 이렇게 확고하게 서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사람들 사이에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아마도 사십, 불혹 不惑일 것이다. 사십 이 되면 생의 후반기에 접어든다. 전반기에 뿌렸던 씨를 거두는 나이이다.
그만큼 재물도 쌓이고 지위도 올라간다. 경제 사회적 지위가 확보되면 그
에 따른 문제가 파생한다. 재물을 쌓는 과정에서 송사도 따르고 지위가 올
나갈수록 만나는 사람도 많아진다. 여기에 수많은 충돌과 유혹이 따라온
다. 이럴 때는 확고한 자기 기준이 있어야 한다. 즉 하지 말아야할 것과 해
야 할 것의 경계를 가를 척도가 필요하다. 유혹이라는 외부적 사태를 자기
내부의 확고한 기준으로 물리쳐야 한다. 공자는 마흔에 이를 완성한다. 그
것이 이른바 불혹이다. 괴력난신怪力亂神과 이단 異端에 흔들리지 않는 TL
을 확립한 것이다. 저희는 『논어』 주석에서 불혹의 의미를 정확히 짚는다.
“사물의 타당한 이치를 의혹 없이 확신하게 되면 앎이 밝아져 무엇을 지킬
펴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끊임없는 공부로 마흔에 주관성이 확립됐다면 싶은 그렇게 쌓은 주관성을
검토한다. 주관성은 고유하고 개별적이기에 늘 점검해야 한다. 내가 옳다.
고 해서 세계의 옮음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나의 정당성을 세계의 보
편성 아래에서 비춰봐야 한다.
공자,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대동 사회 大同 社會 더불어 번영하는 사회
『예기』는 ‘예’를 집대성한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란 지금 우리가 흔히 쓸
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할 때의 예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예절 Etiquette 이
나 예의 Manner라기보다는 인간문화 Human culture의 총체라는 의미에 가깝다. 『예기』는 중국 고대사회의 윤리, 종법 제도, 계급 관계 등등 사회 전반의 질서를 다룬다. 특히 「예운 편은 음양의 조화와 운동에 관한 소논문으로 회와 그것의 성립 기반인 우주의 질서를 고찰한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희로애락’과 세계 철학사에 빛나는 조선의 저류
명한 사단칠정 四端七情 논쟁의 칠 정’이라는 말의 출생지가 이 「예운 편이다.
고대 중국사상은 인간을 칠 정과 인의를 모두 지닌 존재로 보았다. 칠 정은
인간의 고유한 감정이면서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고 행동하는 본성이다.
대해 놓았다. 기존의 말이나 글의」 저공이 민중가요의 한이면 되겠군요.’라고 하
나 그의 부분을 인용해 전용하는 것을 단장취의 斷章取義라 한다. 가의 한 구절을 인용해 ‘선생님 말씀은 이런 의미로 받아들
LA 한 것이 단장취의 斷章取義의 한 예이다. 이 두 줄의 시에
서 글자를 뽑아 절차탁마라는 말이 나왔다. 적은 뼈, 차는 상아, 탁은 옥, 마는 돌을 가공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그래서 하마는 인격을 갈고닦는다는 의미로 확장되어 실력을 갈고닦는다는 데까지 쓰이고 있다. 저공은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선생은 더 나은 길을 가르쳐준다. 저공은 깨닫는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고 완성으로 가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갈고 다듬어 작품을 만들 듯 인격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뜬다. 인간은 미명 속에 웅크린 가능성의 존재이기 때문에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거기에 인간 존재의 당위와 숙명이 있다. 그래서 『논어』는 절차탁마 바로 다음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것
「 남을 알지 못할까 근심하라.”라는 구절을 넣어 서로 호응할 인간은 끊임없이 배워 인격을 완성해야 할 존재이므로 남이 나 | 않는다고 투정 부릴 여유가 없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게 하였다. 인간은 끊임없이 비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정
길, 그 길에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포옹 하 발전에 더욱 공헌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적고 제이
그 적극적으로 실천
해야 하며, 그것이 인간의 길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저공이 멋지게 ᄋᄉ
한 것이다. 명장 밑에 약졸이 없다고 했던가? 선생만큼 제자도
고 했던가? 선생만큼 제자도 훌륭하다.
저공이 인용한 시는 『시경』, 「위풍」에 나온다. 풍 風은 민속 가요를 모은 지를 말하는데 위풍은 위나라 민중가요 모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시는 원래 3연인데 여기서는 1연만 인용했다.
저기 저 강가를 보라 瞻彼淇奧
푸른 대나무 부드러워 綠竹綺綺
저 아름다운 군자 有斐君子
마치 자른 듯 다듬은 듯 如切如磋 쫀 듯 간 듯 如琢如磨 무게가 있고 위엄 넘치네! 瑟兮間
빛나고 훤칠한 赫兮ᄐ
저 아름다운 군자 有斐君子 )
끝내 잊을 수 없네! 終不可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