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은 이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해 선생의 말씀을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준
다. 이 시를 보면 저공이 하고자 하는 말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라 수행하는 식구가 제법 많았다. 이들이
치사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대브브
하는 식구가 제법 많았다. 이들의 숙식이 늘 문제가 되었는데,
공이 공자 하단의 살림을 맡아
도 했지만 대부분 자체로 해결해야 했다. 이재에 밝은 자
부를 축적하고 노나라와 이
나의 살림을 맡아 꾸렸다. 훗날 저공은 시세 차익으로 막대한
하고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냈다. 그는 사업 수완이 탁
– 베마 아니라 잘해 공자의 칭찬을 받았으나, 때론 너무 말이 앞선
다고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이의 대화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고증할 길은 없지만 저공이 부를 축
적한 후의 일이지 싶다. 재산이 많았지만 교만하지 않았던 저공이 넌지시 물은 것이다.
“선생님,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나름 자신감에 차 있던 자공에게 선생이 한마디 한다.
“괜찮다.”
공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자공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가는 현대 중국어 ‘츠아뿌뚜러’ 差不多了라는 표현과 같은
것으로 약하게 부정할 때 쓴다. best’가 아니고 ‘so So’ 이다. 다음에 그러
나’ but 같은 접속사가 붙는다.
리가 있으나, 그러나 더 좋은 것이 있다는 의미가 가속에 담
네 말도 일리가 있으나, 그러다
공의 말이 소극적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어떤 것을 하
겨 있다. 자공의 말이 소극적이
습니까?’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의지다. 그래서 공자가 제
지 않으면 어떻습니까?’라는 부정
[면에서 예를 좋아하면 더욱 좋다고 적극적 실천의 길을 제
자에게 부자이면서 예를 좋아서
때 한다.
늘 인용해 선생님 말씀에 장단을 맞춘다.
어느 날 자공이 공자께 물었다.
“가난하면서 아점 하지 않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아 on
고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개 차겠지 그러나 가난하면서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 예 禮를 조
ᄇ 의하면서 예 禮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하단다.”
이에 자공이 대꾸한다.
“자른 듯, 다듬은 듯, 쫀 듯, 간 뜻이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겠군요?” | 그러자 공자께서 큰소리로 말씀하신다.
“사야! 이제 너와 비로소 시를 이야기해도 되겠구나! 지난 것을 알려주니
올 것을 알아차리는구나.” 자공은 공자의 직계 제자이다. 이름은 토막나무 사이고 자공은 자이다. 공자는 부쩍 성장한 제자를 보고 덜컥 ‘사’라며 자공의 아명을 부른다. 관습 적은
노 성장한 어른에게 이렇게 부르지 않는다. 아주 친근한 사이가 아니면 실
예에 속한다. 공자는 훌륭한 제자를 얻은 기쁨에 겨워 다정하게 아명을 부
든 것이었다.
자공은 위나라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줄곧 위나라의 시, 즉 민중가요를 등
고 자랐다. 공자의 말씀에 기억 저편의 노랫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선생님 말씀은 이런 뜻이군요!” 스승의 어떤 말에 갑자기 깨우침을 얻은 것인가! 『사기』, 「중니제자열전」 을 보면 “사는 천명을 받지 않고 재물을 불렸는데 시세에 능했다”라는 구 절이 나온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로다.”라고 자책하면서 집현전 징계한 서
지현점 직제학 설 순 에게 효
자와 열녀, 충신의 사례를 뽑아 그림을 덧붙여 채의
이 사례를 뽑아 그림을 덧붙여 책을 편찬하라고 지시할
이렇게 『삼강행실도』가 탄생한다.
고한 인도를 세종이 적극적으로 수용
이는 『논어』의 기본적 관점인 백성의 교화 인도를 세종이 정 그저 이 한 결과이다. 『논어』, 「안연편을 보면 계 강자와 공자의 대화가 나온다. 계 강자가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인지 묻는다. “무도한 사람을 죽여 백성의 도를 이끌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그대는 정치하는 사람이다. 어찌 사람을 죽여 그것을 하려는가? 그대가
선을 행하고자 한다면 백성도 선해질 것이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
인의 덕은 풀과 같다.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된다.”
임금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공자의 말을 세종이 각인한 것이다.
이 책은 조선 민중 사회에 급속히 파고들었다. 세종의 기획은 크게 성공해
다. 상명하복 上命 下服을 강요하는 효, 열, 충 같은 개념이 나라의 기강을 새우 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아무리 좋은 통치 이데올로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
이다. 충은 본래 『논어』에선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을 뜻했다. 그러나 이
임은 조선 사회에서 기득권 세력만을 위한 국가에 대한 절대적 복종의
노 변질하고 만다. 효나 열도 경직화되어 앞에서 말한 단지와 할 고쳐]
작용을 불러왔다. 「동아일보의 사설에 지적한 것처럼 자식과 아베다
하는 불평등 억압 기제가 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도 이에 비판적 의견을 개진한다. 그는 「열부론 이렇게 쓴다.
단지와 할 고가 효자와 여
이는 도덕의 근본 취지가 왜곡된 껍질 도덕이라는 것이다.
하고가 효자와 열녀의 상징이 된 데는 조선 최고의 스테디셀러 caller 『삼강행실도』가 단단히 한몫했다. 알려진 바로는 조서, 많이 찍은 책이 『책력』, 『규장전운』, 다음이 『삼강행실도』라고 한다.
『책력은 달력으로 농업 구이
이 다려으로 농업국인 조선에서 생활필수품이었다. 규장전운은
이조이 어학 사전으로 정조 때 발행했다. 『삼강행실도』는 세종 13년 1431년
에 첫 간행을 했고, 중종 6년 1511년 무려 2천940질이나 찍었다고 한다. 인구
나 경제적 규모를 고려하면 지금의 1천만 부 수준이다. 사실 이는 상식을
위배한다. 조선은 성리학의 국가이고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였기에 당
연 사서 四書가 인기상품이 되어야 할 터인데 어찌 그 자리를 삼강행실도가 차지했는가 하는 점이다. 나라 살림이 바닥나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조
선왕조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삼강행실도』에 집착했을까.
세종 당시는 조선 초기라 아직 왕실의 기반이 확고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
은 조선 왕조의 건국이념으로 무장한 새로운 신진 관료가 필요했다. 이런 점에서 유교의 이념이 분명히 담긴 『삼강행실도』는 이른바 의식화 교육
자료로 충분한 가치가 이었다. 더구나 텍스트뿐만 아니라 삽화도 들어 있
게 내용을 효과 적은로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일종의 교화서
어 독자에게 내용을 효과적으
섰기에 문맹자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넣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