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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욕망이 남는다

“오라, 너희 무리여, 나의 백성이여. 모두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억지로 어
지러 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명하길 하나라 죄가 크니 어서 벌하라 하셨다. (중략). 하지만, 너희는 또 이렇게 불평한다. 하나라 죄악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이
사 옵니까? 그러나 폭군 걸이 백성과 자기의 도읍을 해쳐, 그곳의 백성은 폭
군에게 등을 돌리고 울며 그저 자기 나라가 망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하나
라의 덕이 이와 같으니, 지금 난 천명을 받들어 나아가겠노라.”
이 대중 선동은 새 왕조를 여는 정당성을 늘 천명 天命에서 찾아온 동북아
시야 역사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민심이 현 왕조를 떠났으니 하늘
이 새로이 천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현 왕조의 부도덕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도덕성을 내세워,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구한다. 이 전략은 역사 전반
에 걸쳐 반복된다.
이렇게 의욕적으로 출발한 새 왕조는 초기에 대부분 융성한다. 그러나 2,
3대 언저리에서 골육상잔의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쇠락하다 4, 5대쯤
에서 위대한 성군이 나타나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패턴은 역사에서 공통으로 되풀이된다.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도 그렇다.
과 광대를 불러 놀기를 좋아했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 나뭇가지에 고기를 매달아 숲을 꾸몄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벌거벗은 남녀를 풀어놓고 밤새 술을 마시며 놀게 했다. 이러한 주의 행동은 백성의 원망을 불러왔고 많은 제후가 등을 돌렸다. 그러자 주는 이를 탄압하고자 포격炮格이라는 형벌까 지 만들어냈다.” 재주가 너무 뛰어나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으며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해 그녀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별짓을 다 하고 종국엔 이를 비판하는 이들을 가혹한 형벌로 다스리는 것. 이것이 폭군의 대표적 행태다. 이 우리가 자주 쓰는, 육체적 쾌락을 끊임없이 탐닉한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글자 그대로 술로 연못을 채우고 고기 숲에서
논다는 뜻이다. 욕망의 한계는 끝이 없다. 식과 색은 인간 욕망의 물리적
토대이다. 다른 곳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욕망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빠져들어 간다. 왕이 이쯤 되면 막가자
는 거다. 대 잃은 국가를 바로잡으려 나서는 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번 막간 왕은 돌이킬 수 없다. 주 임금은 자신을 비방하거나 배반
하는 사람들, 특히 실정을 간하는 이들을 잡아다가 모조리 형벌에 처했다. 그것도 모자라 새로운 형벌을 고안해냈는데, 위에 등장하는 포격이 그것이다. 포격은 포락지형他惱之刑이라고도 부른다. 사기에 나오는 포격의 격 格은 ‘지지다’라는 뜻의 록과 그 의미가 같다. 이 형벌은 꽤 끔찍하다. 구리기
중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인이 그 위를 맨발로 걸
어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로 떨어지면 그대로 타죽게 하는 형벌이다.
주 임금과 달기는 사람이 산 채로 불에 타죽는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 拍掌 大
정치는 인재 구하기이다.
강태공 姜太公 강태공이 인재를 기다린다.
주나라는 하의 자연주의와 은의 종교 주의를 융합해 중국 문화의 토대인 인
문 주의를 완성했다. 공자는 이것을 정치의 이상적인 완성으로 생각했다.
공자는 거침없이 이렇게 선언한다.
찬란하다. 그 문화여! 나는 주를 따르리라.”
주나라는 동북아시아에서 하나의 상징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씨 가문도 그 앞날이 창대해질 것을 기원하며 『용비어천가』에 다음과 같이 썼다.
1
붉은 새가 글을 물고 와 주나라 문왕의 침실문에 앉으니, 이는 그의 아들인 무왕의 앞날에 하늘이 내리신 복이라. 이처럼 뱀이 까치를 물고 와 큰 나뭇가지에 얹으니, 이는 이씨 왕조의 앞날에 하늘이 경사스러운 일만 있음을 알리는 것임이라.
부 터 차츰 빛을 보기 시작한다. 고공 단보에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장 남이 태백, 차남이 우중, 막내가 계략이었다. 계략의 어머니는 태가이고 아
내는 태입니다. 티강과 태임은 모두 어진 부인이었다. 태임이 아들 창블을
낮았을 때 성스러운 길조가 있었다. 그러자 고 공단 보는 “나의 시대에 큰 사
업을 일으킬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창이 바로 그인가 보다.”라고
말했다. 다른 두 아들 태백과 우중은 고공 단보다 계략을 옹립하여 그의 아
들 창에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것을 알고는 같이 형만으로 달아나 문신을
하고 머리털을 짧게 자르고서 왕위를 계략에 양보했다.
결국, 두 숙부 태백과 우중의 양보로 계략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 이가
바로 문왕 창이다. 훗날 공자는 아버지 뜻을 따라 왕위를 조카에게 양위한
태백과 우중을 칭송해 마지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문왕은 창
업의 기반을 닦는다. 문왕은 휴직과 공류의 사업을 따르고 고 공단 보와 공
계의 법도를 본받아 오로지 어진 정치를 행하고 늙은이를 공경하며 어린
이를 사랑했다. 그러자 천하의 현사가 모여들었는데 백이 伯 理와 숙제 叔 制도
그 틈에 끼어 있었다. 이때만 해도 문왕은 서 백 西 白으로 불렸다. 문왕은 당
시 가장 강했던 상국上國인 은나라 서쪽 땅의 한 제후에 지나지 않았을 때
문이다. 백 伯은 제후라는 뜻이다.
민심이 선정을 베푸는 문왕에게 쏠리자 이를 시기한 무리가 생겨났다. 승
후 호가 은나라의 폭군 주에게 문왕을 경계하라고 고자질하자, 주는 문왕
서 백을 유리에 유배시킨다. 유리에 유배 중일 때 문왕은 백성을 위해 『주역』의 근간이 되는 8패를 기본으로 하여 64괘 8×8-64를 만들었다고 한다.
문왕은 유배지에서 나오자마자 비옥한 낙하 서쪽 땅을 주왕
에게 바치며 그 대가로 포격형의 폐지를 주청한다. 주왕이 이를 허락하자
이 일로 문왕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폭군 주의 확정이 나날이 심해지고
문왕이 인정 仁政을 베푸니 민심의 향방은 자연스레 문왕에게 쏠렸다. 서서
하 역성혁명의 날이 밝아온다.
혁명의 깃발을 올린 것은 문왕 아들 무왕이었다. 무왕의 혁명에서 중추 역
할을 한 것은 동생 주공과 무왕의 스승 태공망太公望이었다. 태공망은 원래
강 씨인데 여상 지역을 분봉 받아 나중에 ‘여상’ 이라 불렸다. 여상이 태공망
의로 불리게 된 사연은 이렇다. 문왕이 여상을 만났을 때 여상의 나이 일흔둘이었다. 여상은 가난하고 나
이가 많았는데 낚시로 문왕 서 백에 접근하려 했다. 문왕이 사냥을 나가려
다 점을 쳤는데 점괘가 잡을 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니다. 바로 패왕을 보필할 사람이다’라고 나왔다. 문왕이 사냥을 나갔다.
가 과연 위수 북쪽에서 여상을 만났는데, 이야기를 나누어보고는 크게 기
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선대 강태공과 공단로 때부터 이르기를 장차 성인이 주나라에 올 것이며,
주나라는 그의 힘을 입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이 진정 그분
이 아닙니까? 우리 강태공께서 선생을 기다린 望이지 오래되었습니다.” | 오늘날 낚시꾼을 강태공 姜太公이라고 부르는데, 그 출전이 바로 여기이다.
라 간청한다. 문왕은 유배지에서 나오자마자 비옥한 낙하 서쪽 땅을 주왕
에게 바치며 그 대가로 포격형의 폐지를 주청한다. 주왕이 이를 허락하자
이 일로 문왕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폭군 주의 확정이 나날이 심해지고
문왕이 인정 仁政을 베푸니 민심의 향방은 자연스레 문왕에게 쏠렸다. 서서
하 역성혁명의 날이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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